로마가 도착하기 전에
로마 이전의 두가: 누미디아와 푸니키아의 기원
국회의사당이 세워지기 수세기 전, 두가는 푸니크 문화의 영향을 받은 누미디아의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그 유적지에서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로마 이전의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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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Dougga)의 역사는 로마보다 수 세기 앞선 중요한 정착지로서의 기원을 지닙니다. 이곳은 기원전 202년부터 148년까지 누미디아를 통치한 마시니사 왕의 치세에 누미디아 도시로 번성했습니다. 당시 누미디아 왕국은 동쪽 평원 너머의 카르타고와 때로는 동맹, 때로는 경쟁자였던 강력한 이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전은 누미디아 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이후 아테반 영묘(Mausoleum of Ateban)로 알려진 지역 누미디아 귀족의 웅장한 장례 기념물도 이 시대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두 유적은 두가가 로마에 복속되기 훨씬 이전부터 자체 엘리트를 가진 진정한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물리적 증거이며, 로마가 나중에 정착한 단순한 빈 땅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카르타고의 푸니크 그림자
두가(Dougga)는 정치적으로는 누미디아 왕국의 영토였지만, 카르타고의 문화적 영향권 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로마 이전 층위에는 푸니크의 영향이 고고학적으로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신푸니크어 비문이 새겨진 봉헌 비석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이후 로마 시대 성벽의 일반 건축 자재로 재사용되며 원래의 종교적 의미를 잃기도 했습니다. 이는 카르타고가 기원전 146년에 멸망한 이후에도 수 세대에 걸쳐 푸니크어와 종교 관습이 두가에서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로마가 이 도시의 행정을 인수했을 때 물려받은 것은 순수한 토착 정체성도, 순수한 카르타고 정체성도 아닌, 바로 이렇게 융합된 누미디아-푸니크 정체성이었습니다.
두 개의 공동체, 하나의 언덕 위
로마의 영향력은 기원전 46년 결정적인 타프수스 전투 이후 두가에서 더욱 커졌지만, 그 후 2세기 이상 이 도시는 하나의 언덕을 공유하는 두 개의 분리된 공동체로 통치되었습니다. 시민적 충성이 두가 자체가 아닌 카르타고 식민지에 향했던 로마인 공동체와, 수페테스라고 불리는 자체 관리들이 다스리던 토착 누미디아 공동체가 그것입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로마 속주 행정이 지닌 파편화된 기준으로도 이례적이었던 이 이중 구조 덕분에 두가의 누미디아 정체성은 로마와의 접촉으로 단순히 지워지지 않았고, 대대로 평행하면서도 법적으로 구별되는 공동체로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이중 행정 체제는 마침내 서기 205년에 통합되었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지금의 리비아에서 태어난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가에 처음으로 단일 시민 정부 아래 하나의 무니키피움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서기 261년에는 이 도시가 다시 승격되어 속주 도시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시민 등급인 정식 로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두 번의 승격 모두 두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카피톨리움과 극장이 이미 수십 년간 자리 잡은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도시의 부와 건축적 야망은 로마 행정부가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기 훨씬 전부터 공식적인 정치적 지위를 이미 능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이전 시대의 층위가 중요한 이유
북아프리카의 많은 로마 유적지는 방문객에게 순수한 로마의 흔적만을 보여주며, 그 이전 시대의 층위는 매몰되거나 채석되어 사라지거나 박물관 라벨의 한 줄로 축소되곤 합니다. 그러나 두가는 다릅니다. 누미디아와 푸니크의 기원이 발굴 보고서가 아닌 땅 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카피톨리움보다 3세기 이상 앞선 기념물들이 불과 몇 걸음 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두가는 로마가 빈 들판에 도착해 새로운 문명을 강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오래되고 정교했던 북아프리카의 도시를 로마가 물려받아 그 위에 문자 그대로 건설한 이야기로 읽힙니다.